오전 11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저장된 번호가 아니면 전화를 잘 안 받는 나인데 그날은 왠지 이상하게 받고 싶었다.
“어머니, 안녕하세요! 저 OO이 담임 김OO 입니다.”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을까?
“어머니 OO 이가 학교에 안 와서 연락드렸어요.”
분명히 아침에 나갔는데, 이 아이는 어디로 간 걸까?
이날 처음으로 아들의 방황을 알게 되었다.
내가 알기 시작한 날부터 보이기 시작한 아이의 방황 너무도 내겐 충격이고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나쁜 일은 한꺼번에 온다고 했던가, 나는 그때 카페를 오픈하고 여러 가지로 힘든 시기였다. 아이의 방황이 나의 부족함으로 생긴 것 같았다. 정말 죽고 싶었다. 하지만 죽을 수 없었다.
나의 엄마는 내가 19살 때 고혈압으로 돌아가셨다. 살면서 엄마가 그리운 날이 많았다.
특히 내가 둘째 딸아이를 낳던 날을 평생 잊을 수 없다.
너무 보고 싶어서 가슴이 메게 울었다.
아마 돌아가셨을 때보다 더 많이 울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결심했다.
내 딸이 아이를 낳을 때 꼭 옆에 있겠다고.
그래서 난 살아야만 했다. 함께 이 시기를 잘 넘겨야 했다.
나는 아이의 마음이 궁금해졌다.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청소년학과를 공부하고 싶었는데 학점이 부족해할 수 없었다.
학점을 채우기 위해 나는 관심도 없는 사회복지사를 공부하기 시작했는데
과목 중에 배우는 아동학, 청소년학. 심리학 등이 굉장히 큰 도움을 주었다.
하지만 내 목표는 청소년학과였다. 학점을 채우기 위해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기 바빴다.
딴생각할 틈 없이 그렇게 2년이 지났다.
나는 사회복지사가 되어 있었고 아이의 사춘기는 끝이 났다.
그렇다. 나는 아이의 방황을 인정했고, 믿고 기다렸다.
공부를 시작하면서 아이의 방황에만 집중했던 내 모습이 변했다.
나는 매일 아이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지만 아이 앞에서는 굉장히 쿨 한척했다.
사람을 해하는 행동만 하지 말라고 당부했고 어떤 잔소리도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정말 참을 인(忍)을 수도 없이 혼잣말로 되뇌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공부에 집중해서 그 시기를 견딜 수 있었던 게 아니라, 견디기 위해 공부를 한 것 같다.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사춘기 자녀를 둔 부모에게 위로와 희망을 나누고자 하는 마음에서이다.
그리고 나의 셋째!
4살 막둥이의 사춘기도 잘 보내라고 내게 보내는 응원의 글이다.
겪어보니 야단하면 듣지도 않고 더 큰 사고만 치고 멀어져진다.
엄마를 많이 닮은 나는 아빠에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나는 빨리 집을 떠나고 싶었고 어린 내가 이 집을 떠날 수 있는 방법이 많지는 않았다.
21살 나는 엄마가 되었다. 나는 아이와 함께 자란 것 같다.
엄마가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도 모르고 그냥 아이를 키웠었다.
아이의 방황이 나를 성장시켰고 세상과의 끈이 되어 집 밖으로 나오는 계기가 되었다.
지금 나는 N잡러로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다.
1. 사회복지사
2. 해외 구매 대행 (유럽)
3. 스마트 스토어 운영
4. 커피 바리스타 학원 강사
5. 1인 기업 사업가
6. 위더스크루 책방 대표
앞으로 그리는 꿈에 다가서는 내 모습이 기대된다.